‘한심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일주일 됐다. 크리스마스와 신년에 일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갸륵한 마음이 ’한심한 휴가‘라는 타이틀로 선물된 것이다. 부모님 집에 갔다. 집 밥 몇 그릇씩 먹었다. 강아지와 산책도 했다. 나를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간식도 줬다. 서울로 가기 전 엄마 사무실에 인사하러 들렀다. 엄마가 말했다. 냉장고에 과메기가 있단다. 늘 그렇듯 아무도 안 먹으니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나또한 과메기와 별 관계가 없다. 거절했다. 문득 귀국하자마자 바로 만난 친구의 푸념이 떠올랐다. “겨울이면 과메기 먹어야 하는데!”. 과메기와 관계가 생겼다. 다시 집으로 가서 과메기를 챙겨 들뜬 마음으로 서울로 갔다. 녀석은 이미 집에 와있었다. 막걸리 두 병과 마늘과 초고추장까지 함께. 평일에 갑자기 ‘밤 9시에 과메기 먹을래?’해도 만날 수 있는 녀석과 나는 놈팽이가 맞다.
몇 점 먹으니 물려서 라면 끓여먹었다. 라면 고르는데도 한참 걸렸다. 다행인 건 작은 편의점이라 라면 종류가 적었다는 것이다. 대형마트였다면 시간 많은 우리는 라면 코너 앞에서 15분 이상 토론했을 것이다. 백수 두 명에게 어떤 라면을 먹을 것인가는 대단한 문제다. 일을 통해 고도의 사색을 거쳐 효율과 혜택이 동반하는 선택을 할 일이 없기에 이런 영역에서 그 본능적 성취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은 ‘무파마’였다. 너무 새로운 도전이 아니면서 너무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해외 일정으로 결핍됐던 칼칼함에 대한 그리움마저 해결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집에서 받은 김치가 출국 몇 주간 적절하게 시어있어 감동은 배가 됐다. 과메기와 김치. 즐거운 한때의 시작과 끝이 엄마의 품에서 비롯된 것을 보면 녀석과 나는 캥거루가 맞다.
네팔로부터 귀국 당일 녀석을 만난 건 생산적인 이유에서였다. 물론 우리의 생산적인 활동은 보통 1~2시간내에 끝나며 대부분 놀기위한 만남의 명분으로 귀결된다. 이번에는 시놉시스였다. 전에 써둔 시나리오를 4페이지 시놉시스로 정리했는데 이에 대한 나의 피드백 받기가 명분이었다. 더 ‘멋진’ 피드백 대화를 열기 위해 나는 시놉시스를 읽고 연상된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함께 보자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명분은 역할을 완수했다. 과메기와 라면을 먹은 다음 날. 우리는 ‘에무시네마’로 영화를 보러 갔다. 종일 놀았는데 늦어서 음료도 못 산채 바로 착석했다.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였다.
이후 종로의 한 치킨집에 들어갔다. 그곳은 마치 테이블 별로 이야기가 꾸려진 옴니버스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술취한 상사 한 명과 나머지 남자 팀원 세 명의 테이블, 벌건 얼굴로 삶과 가치에 대해 충고하는 젊은 리더와 이를 듣는 둥 마는 둥 앉아있는 남자 세 명의 테이블(기술직에 종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로 연극 배우처럼 보이는 빵모자를 쓴 노인 두 명의 테이블, 애틋하게 대화를 나누는 외국 남자 1명과 한국 남자 1명의 테이블, 이전 정부를 나무라는 중년 남자 6명의 테이블, 계산할 때 괜히 말 한번 던져보는 남자와 친절하게 대응하는 온몸에 핑크를 두른 여자 사장. 정말 영화라면 오프닝 혹은 엔딩 시퀀스로 적절하다. 음악은 ‘Cheek to Cheek’. 그곳에서 내가 웃으면서 새로 생긴 우리의 유행어 같은 질문을 친구에게 던졌다. “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 호탕하게 웃으며 녀석의 대답. “따~악 5년만 더! 따악 5년만 이렇게 살고 5년 후엔 성공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5년 뒤에 우리는 성공해 있을 것이란 아무 근거 없는 강력한 믿음. 녀석과 나는 몽상가가 맞다.
그렇게 다음 날.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카페 소사이어티>,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지골로 인 뉴욕>을 봤다. 우디 앨런을 연달아 봤더니 우리는 그의 배바지 스타일을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튜브에 우디 앨런 패션이라고 검색도 해봤다. 영어로도 해봤지만 물론 아무 영상도 없었다. 3일 내내 영화만 봤던 우리는 <라라랜드> 라이언 고슬링의 말처럼 “For research”, 우리의 시간을 연구의 과정으로 평가했다. 아무런 분석 노트나 메모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쓰는 문체도 우디 앨런에 감화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동안 이러다 말 것이다.
아래는 놀면서 적어 놓은 놈팽이면서 몽상가인 캥거루의 메모다.
1. 여행의 매력은 리셋이다. 누군가는 꿈꾼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그래서 한 사람은 누군가를 떠난다. 아무 문제 없던 그들의 사랑을 말 몇 마디로 종결짓고 매몰차게 짐을 싸야한다. 그건 개인으로선 위대한 결심이지만 누군가에겐 한없이 가혹한 통보다.
2. 루틴을 만드는 것이 두려운 한 남자. 이유는 누군가가 일주일만에 나의 루틴을 파악하고 완벽한 살인 계획을 세울까봐. 특별하게 누군가의 원한을 산 적은 없지만 살다보니 깨우친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에겐 내가 쓰레기이면서 누군가에겐 내가 좋은 사람이란 것이다.
3. 누군가가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는 것은 쉽다. 어려운 건 어떻게 그가 그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보는 것이다. 어렵기에 해볼만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며 왜 그 감독이, 캐스팅 디렉터가 그 결과에 도달했는지 추적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무지 지난하고 남루한 과정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레셔널 맨>에서 캐스팅은 왜 엠마 스톤이었을까. 왜 호아킨 피닉스이었을까. <이레셔널 맨>은 2016년 작이다. 2019년 호아킨 피닉스는 <조커>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됐다. 이성이 극에 달았을 때 오는 자기 합리화는 무적에 가까운 견고함을 달성한다. <이레셔널 맨>에서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세상이 밝아졌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삶에 돌연듯 발생한 목표는 오감을 일깨웠고 비로소 삶은 살아볼만한 일상으로 채워진다.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조커로서 자질이 충분하다.
+지난 주 뉴스레터에 <Editor's notes>가 수정되지 않은 채 이전 회차의 내용으로 발송됐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저의 불찰입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