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바. 남자 세 명이 무대로 등장한다. 무대랄 것도 없다. 악기가 그곳에 있으니 무대다. 짧은 한 곡이 끝난다. 치고 있던 드럼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는 밴드의 리더. 서울에 와서 시작한 첫 자취 시절의 찌질 했던 과거를 곡으로 만들었다며 우쭐대지도 덤덤하지도 않은 말투로 말한다. 이어지는 멤버 소개.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한 명씩. 수사학적인 소개와 가벼운 목례. 본 공연이 시작된다. 모든 자리는 무대를 바라보게 되어있다.
손님들은 공연을 보며 몸을 좌우로 흔들거나 고개를 까딱거린다. 같이 온 여자에게 재즈 지식을 설파하는 남자. 혼자 온 여성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40대로 보이는 잘 관리된 남자. 선율에 집중하면서 바에 앉아 있는 풍채가 넉넉한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패드로 글을 쓰며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중년의 여자. 박사 과정 커플처럼 보이는 손잡은 남녀. 이 모든 모습이 몽타주처럼 재즈 노래에 맞춰 흐른다. 곡이 끝나자 바 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무대로 등장한다. 40대 남자가 쳐다봤던 혼자 온 여자다. 그녀는 보컬이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Bye Bye Blackbird>.
이 모든 장면은 무대 맞은편 맨 뒤 벽에 붙은 자리에서 태만한 표정으로 감상하고 있던 A의 시선이다. A의 눈앞에 늦게 들어온 커플이 앉는다. 일순 시야가 가려진다. 눈썹을 찡그리는 그의 제스처. 바닥을 보니 앉아있는 커플의 여자 신발이 나이키 운동화다. 한 숨을 쉬며 A는 담배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남아있던 위스키 잔을 다 마신다. 이때 전화가 걸려 온다. 마침 1부가 끝났다는 보컬의 말이 멀리 들리며 A는 밖으로 나간다. A는 담배를 피운다. 밴드 3명과 보컬 모두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운다. 보컬은 오늘 처음으로 밴드와 함께 한 모양이다. 서로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 얘기를 한다. 얘기 하다보니 서로의 취향이 엇나감을 발견하는 보컬과 밴드. 한 명이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A는 재즈 바에 다시 들어온다. 2부 공연이 시작된다. 눈앞의 커플은 사랑으로 뒤엉켜있다. 커플의 남자가 화장실에 간다. 혼자 남은 커플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코트를 의자에 걸쳐 놓는다. 하얀 니트에 청바지를 입었다. 키가 꽤 크다. 갑자기 풍채가 넉넉한 남자가 A 앞을 지나가는데 A의 발을 밟는다. 순간 머리카락이 위로 뻗치는 느낌을 받는다. 애써 참으며 젠틀하게 인사한다. 다시 앞을 본다. 커플의 여자는 맥주를 마시고 있다. A 비어있는 위스키 잔을 다시 들이킨다. 화장실에서 남자가 돌아오자 뽀뽀한 뒤 늘어져있던 긴 머리를 묶는다. 그녀의 손에 반지가 없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먼저 입을 맞춘 적은 없는 것 같다. 의자에 걸친 여자의 코트가 떨어진다. A는 재즈 바를 나가면서 그녀에게 말한다. 코트가 떨어졌다고. 그녀는 고맙다고 얘기한다.
A는 친구와 재즈 바를 나와서 치킨집에 들어간다. 치킨을 시켰더니 케첩과 마요네즈가 올려져 있는 양배추 샐러드가 나온다. 그렇다. 치킨을 시키면 양배추 샐러드가 함께 오는 것이 정석이었다. 언제부터 사라진 걸까. A와 친구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원래 있던 것들이 사라져 가는 현상에 대해 푸념하는 대화를 시작한다. 그동안 치킨의 짝꿍인 양배추 샐러드가 사라졌단 걸 인식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도 든다. 그러다 화제는 예의로 바뀐다.
극단적 예로 클래식 공연이나 세미나에 슬리퍼와 반바지로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슬리퍼를 신었지만 그 분야에 조예가 깊어 누구보다 심도 있게 몰입하는 태도라면 문제 될 것 없지 않은가. 그게 본질 아닌가. 그럼에도 왜 문제라 일삼는가. 조예나 태도 같은 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둥지 친 머리와 슬리퍼로 오는 것은 눈에 보인다. 준비 없이 왔다고 생각된다. 준비란 무엇인가. 당신을 만날 것을 알고 있으니 씻고 적절한 옷을 골라 입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이다. 당신을 위해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가치인 '시간'을 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뿐만 아니다. 당신과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멀쩡하게 보여야 한다. 그들은 둥지 머리인 나를 보면 갸우뚱할 것이다. 그럼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은 나를 주제로 쓸데없는 문답을 하는데 시간을 쓸 것이다. 당신에게도, 당신과 관계한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그런 무의미한 시간을 발생시키지 않으려면, 그냥 논란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면 된다. 다음은 언행이다. 불필요한 자기표현이나 상스러운 단어로 괜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유는 같다.
예의란 당신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내 시간을 들이고, 당신의 시간도 나로 인해 가치 없이 소비되지 않도록 옷, 행동, 말투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의가 또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게 더 중요하면 안지켜도 그만이다. 그렇다고 딱히 안 지킬 이유도 없으니 예의있게 해서 나쁠 건 없다. 이렇게 대충 정리가 되니 A와 친구는 적당히 취기가 오른다. 계산하며 나가며 A는 사장에게 여기 배달도 되나며 묻는다. 가능하단다. 이제부터 치킨은 여기다. 이제 노래방으로 간다. 두 사람은 핸드폰으로 크게 <Amada Mia, Amore Mio>을 키더니 길거리를 흔들거리며 걷는다. 인파 사이로 한 남자가 캐리어를 끌면서 걸어가고 있다. 한 손으론 호떡을 먹고 있다. 아까 봤던 밴드의 리더다.
다음 날. A는 씻지도 않고 카페에 간다. 둘러보니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있다. 커플의 여자다. <Amada Mia, Amore Mio> 아직 흐르고 있다.
+위 글은 지난 토요일 놈팽이면서 몽상가인 캥거루의 하루를 각색한 것입니다. 대부분이 허구이며 대부분은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