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일본을 갔다 오니 1월이 끝나갔다. 겨우 네팔, 일본에서의 짐들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2023년 계획들을 세워볼까 책상에 앉았는데 혜담 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래도 객사하지는 않았는지 전화는 받는구나”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들려온 스님의 말씀이었다.
혜담 스님은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할 나이부터 나를 포함한 내 동생 그리고 마을의 내 불알친구들과 그 동생들, 총 12명의 남자아이들을 친부모처럼 키워 주신 분이다. 경주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12명의 남자아이들. 이렇게 글로만 써도 시끄럽고 난장판일 것 같은 느낌이다. 부모님이 출근하면 우리는 늘 스님이 계신 절에서 놀고 먹고 잤다. 그런 12명의 망나니들은 스님 밑에서 좀 사람답게 생각할 줄도 알게 되고 사회성도 익히고 살아갈 능력을 키웠던 것 같다.
내가 스님과 연락이 뜸해진 것은 고등학교를 울산으로 가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뭐, 사춘기적인 감정 변화나 반항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기숙학교라서 집에 갈 시간 없이 입시에 치여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대학교, 군대, 유학, 해외 생활, 서울로 쭉 이어진 내 삶은 고향과 너무 멀리 있는 삶이었다.
마지막으로 스님을 방문한 것은 막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러니까 6-7년 전이다. 그래도 연초 연말에는 꼭 연락드렸는데 작년에는 아예 연락조차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례적으로 스님이 먼저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에게 그동안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쏟아 내시는 가 싶더니 얼굴 한번 보자며 전화를 끊으셨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라는 생각이 들며 잠시 혼란스러웠다. 옆에 있던 아내는 얼른 가봐라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7시간을 운전해서 스님의 암자로 갔다. ‘혹시 스님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일까?’, ‘계시는 곳에 큰일이 발생한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렇게 도착한 스님의 암자는 내 걱정과 고민이 무색해지게 여전히 구름이 많고 계곡물소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주차를 하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멀리 암자 입구에서 스님이 서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늘 오던 사람 온 것처럼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말씀하셨다. 행랑에는 여전히 나와 친구들의 이름이 적혀진 선반이 있었고 거기에 옷과 바루 공양 식기들이 깨끗하게 놓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대웅전에 창문이 떨어졌다고 고치라 말씀하셨다. 창고에서 이런저런 도구들을 꺼내서 창문을 고치고 있으니 그 옆에 스님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저번달에 효성이가 와서 공양간 굴뚝을 고쳐줬던 이야기, 겨울이 오기 전에 대환이 형제가 나무를 해주고 간 이야기, 재헌이가 불기들을 닦아주고 간 이야기 등. 내 이야기는 전혀 묻지 않으셨다. 전화상으로는 많이 물어보실 것처럼 말씀하셨으면서.
그렇게 하룻밤 자고 새벽 예불을 드린 뒤에 서울로 갈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스님이 내 손목을 잡으시더니 한참을 보셨다. 내 탄생화인 흑종초 타투가 크게 새겨진 쪽이었다. 타투를 새긴 지 2년밖에 안되었으니 처음 보셨을 것이다. 부모님에게 몰래 한 타투를 들킨 것 마냥 우물쭈물하고 서있었는데 한참을 보시더니 물으셨다.
“니는 행복하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냥 우물쭈물 대다가 “좋아하는 일 하니까 행복하죠”식의 답을 했다. 그러니 스님이 오른쪽 팔 위에 새긴 내 탄생화를 만지면서 나를 보시더니 식 웃으셨다.
서울 올라가는 길에 내가 한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계속 생각났다. 좀 더 당당하게 말씀드릴 걸, 좀 더 여유 있게 말씀드릴 걸.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우물쭈물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조수석에 스님이 아내랑 먹으라고 챙겨 주신 곶감이 보였다. 아내가 곶감 좋아한다고 전에 전화로 흘려가듯이 이야기했었는데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 건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곶감 맛있어한다고 꼭 전화드려야겠다.
네팔, 일본을 갔다 오니 1월이 끝나갔다. 겨우 네팔, 일본에서의 짐들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2023년 계획들을 세워볼까 책상에 앉았는데 혜담 스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래도 객사하지는 않았는지 전화는 받는구나”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들려온 스님의 말씀이었다.
혜담 스님은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할 나이부터 나를 포함한 내 동생 그리고 마을의 내 불알친구들과 그 동생들, 총 12명의 남자아이들을 친부모처럼 키워 주신 분이다. 경주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12명의 남자아이들. 이렇게 글로만 써도 시끄럽고 난장판일 것 같은 느낌이다. 부모님이 출근하면 우리는 늘 스님이 계신 절에서 놀고 먹고 잤다. 그런 12명의 망나니들은 스님 밑에서 좀 사람답게 생각할 줄도 알게 되고 사회성도 익히고 살아갈 능력을 키웠던 것 같다.
내가 스님과 연락이 뜸해진 것은 고등학교를 울산으로 가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뭐, 사춘기적인 감정 변화나 반항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기숙학교라서 집에 갈 시간 없이 입시에 치여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대학교, 군대, 유학, 해외 생활, 서울로 쭉 이어진 내 삶은 고향과 너무 멀리 있는 삶이었다.
마지막으로 스님을 방문한 것은 막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러니까 6-7년 전이다. 그래도 연초 연말에는 꼭 연락드렸는데 작년에는 아예 연락조차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례적으로 스님이 먼저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에게 그동안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쏟아 내시는 가 싶더니 얼굴 한번 보자며 전화를 끊으셨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라는 생각이 들며 잠시 혼란스러웠다. 옆에 있던 아내는 얼른 가봐라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7시간을 운전해서 스님의 암자로 갔다. ‘혹시 스님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일까?’, ‘계시는 곳에 큰일이 발생한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렇게 도착한 스님의 암자는 내 걱정과 고민이 무색해지게 여전히 구름이 많고 계곡물소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주차를 하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멀리 암자 입구에서 스님이 서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늘 오던 사람 온 것처럼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말씀하셨다. 행랑에는 여전히 나와 친구들의 이름이 적혀진 선반이 있었고 거기에 옷과 바루 공양 식기들이 깨끗하게 놓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대웅전에 창문이 떨어졌다고 고치라 말씀하셨다. 창고에서 이런저런 도구들을 꺼내서 창문을 고치고 있으니 그 옆에 스님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저번달에 효성이가 와서 공양간 굴뚝을 고쳐줬던 이야기, 겨울이 오기 전에 대환이 형제가 나무를 해주고 간 이야기, 재헌이가 불기들을 닦아주고 간 이야기 등. 내 이야기는 전혀 묻지 않으셨다. 전화상으로는 많이 물어보실 것처럼 말씀하셨으면서.
그렇게 하룻밤 자고 새벽 예불을 드린 뒤에 서울로 갈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스님이 내 손목을 잡으시더니 한참을 보셨다. 내 탄생화인 흑종초 타투가 크게 새겨진 쪽이었다. 타투를 새긴 지 2년밖에 안되었으니 처음 보셨을 것이다. 부모님에게 몰래 한 타투를 들킨 것 마냥 우물쭈물하고 서있었는데 한참을 보시더니 물으셨다.
“니는 행복하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냥 우물쭈물 대다가 “좋아하는 일 하니까 행복하죠”식의 답을 했다. 그러니 스님이 오른쪽 팔 위에 새긴 내 탄생화를 만지면서 나를 보시더니 식 웃으셨다.
서울 올라가는 길에 내가 한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계속 생각났다. 좀 더 당당하게 말씀드릴 걸, 좀 더 여유 있게 말씀드릴 걸.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우물쭈물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조수석에 스님이 아내랑 먹으라고 챙겨 주신 곶감이 보였다. 아내가 곶감 좋아한다고 전에 전화로 흘려가듯이 이야기했었는데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 건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곶감 맛있어한다고 꼭 전화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