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말 자는 것 말고는 여가생활이 없다.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워서 꾸역꾸역 아이패드로 온갖 영상을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마저도 불을 다 끄고 누워서 보다보니 앞부분만 보고 잠드는 것이 대부분의 날이다.
퇴근하고 씻고 잘 준비를 하고 '누워서 뭘 틀어놓고 잠들어야(벌써 볼 생각이 아니고 잠들 생각임) 잘 틀어놨다고 소문이 날까' 생각하다가 문득 어느날 영화를 하나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날따라 괜히 옛날에 좋아하는 영화들을 모아 둔 하드디스크를 열었다.
오랜만에 예전부터 좋아하던 영화들의 제목들을 반가워하며 훑다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를 발견했다. 꽤 긴 영화라 고민하다가 전설의 마지막 장면만 감상했다. 살벌한 대사들과 만화같은 연출, 피칠갑이 되는 배우들과 징그러울 정도로 잔인한 장면에서 흐르는 신나는 음악. 이상한 통쾌함을 느끼면서 오랜만에 피가 끓어 쿠엔틴 영화를 주르륵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처음 꺼내 든 영화는 비교적 최근 작품인 [The Hateful Eight]. 첫 장면부터 가슴이 뛰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오랜만에 잠들지 않고 다 봤다. 거의 아침이 되어서 영화가 끝나고 나는 왜 잠들지도 않고 끝까지 볼 수 있었을까. 왜 쿠엔틴 영화를 좋아할까 생각해봤다.
쿠엔틴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음악이 좋고, 연출이 기가 막힌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만화같은 연출에 잔인한 B급 감성이 좋다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 길고 대사 많은 영화를, 심지어 처음 보는 이야기도 아닌 몇 번은 돌려봐서 결말도 내용도 다 아는 영화를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해서'였다.
쿠엔틴은 글을 잘 쓰고 그 글을 영상으로 잘 보여준다.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 싶을 텐데 그렇지 않은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알지 않는가. 이런 의미에서 단순하다는 표현은 나쁜 말이 아니라 엄청난 극찬이다. 쿠엔틴 영화는 러닝타임이 길다. 등장 인물도 많고 설명해야 하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전혀 영화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하고 명료하다.
이런 짤막한 일기하나 쓰는 데에도 문단을 바꿨다가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가 문장을 쓰고 지웠다가 별 짓을 다하는데, 2시간이 훌쩍 넘는 긴 영화를 만들면서 그 단순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쓸까 상상해보면 나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다.
어떤 작업의 결과물에서 단순함을 느꼈다면,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을지 헤아려볼만 하다. 그럼 단순성에서 꽤 큰 경이로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 글이 쉽고 단순한 이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