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고 올 해도 슬슬 저물어 가네요. 항상 시간은 금방 흐르는 기분입니다. 님이 양의 편지를 받은지도 어느새 훌쩍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양은 누굴까요? 아마 이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는 분들 중 절반 정도는 양이 누구인지 아실거라고 생각하고 절반 정도는 진짜 양이 누군지 모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너무 오래도록 양으로 살아와서 '양 = 나' 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는데
우선 양은 저의 오랜 별명입니다. 15살에 같은 반 친구가 심한 곱슬머리인 저를 놀리기 위해 만든 별명이죠. 괴팍한 실제 이미지와 상반된 온순한 동물, 양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단순함과 강렬함. 꽤 재밌는 작명이었기 때문인지 그때부터 저는 주변 모두에게 양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덕분에 이 별명의 힘은 꽤 대단했습니다. 중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양'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니까요. 안타까운 건 저의 본명을 말하면 '걔가 누군데?' 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걔 있잖아~ 양.' 이라고 대답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
그 뒤로 고향을 떠나 대학생 시절에도 양으로 살아왔고, 심지어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닉네임을 부르는 문화 때문에 계속해서 양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20년에 걸쳐서 '양'으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본명으로 산 인생보다 양으로 산 인생이 더 길다...)
다만 양의 인생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사회, 대학원 세상에서 사건이 생깁니다. 저를 소개해야 하는 순간에 도저히 '양'이라고 소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양이라는 페르소나에 숨어 자유롭게 지내던 제가 갑자기 벌거벗은 기분으로 본명을 써야하는 상황이 온거죠.
대학원에는 제가 '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xx 선생님' 'xx쌤' 등으로 불리죠. 20년을 양이라고 불려왔는데 갑자기 다른 이름(니 이름이야...)으로 불리니까 대학원에서는 제가 행동이 평소같지 않고 자주 삐걱거리게 되더라고요. '아니... 남들 다 본명으로 사는데 뭘 또...' 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조금 불안하다고 느낄 정도로 학교에서 자주 고장나고 삐걱거립니다. 정말 이게 기분이 이상합니다. 아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그렇게 고장난 저의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발견해서 단순히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 탓과 내향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호명'의 문제라고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호명'이라는 것의 힘을 명확하게 느끼게 된 건데요. 그 순간은 마지막 학기 우연히 학교에서 지인을 만난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너무 오래 연락을 하지 않아 근황을 몰랐으나 같은 공부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그 지인과 수업도 같이 듣고 오랜만에 만나 옛 이야기와 더불어 상담에 대한 여러 의견을 나누다보니 내가 그동안 고장나고 삐걱거리던 이유를 눈치채게 된거죠.
그 지인은 당연하게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를 '양'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저를 '이xx 선생'이라고 호명하는 그 세계에서 '양'이라고 불리자마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그 순간 동시에 '아, 내가 왜 학교만 오면 고장나는지 알겠다.' 고 느낀거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수준)
'양'은 누굴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썰을 풀다가 왜 이렇게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했냐면요. '양'이라는 건 닉네임 뒤에 숨은 가면에 덮인 의문의 수수께끼 인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긴 시간 저의 글들을 읽어주시고 함께 음악을 즐겨주셨던 여러분들에게 저는 아주 솔직하고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양 뒤에서 오래도록 숨어 지내다보니 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님이 양이 어떤 존재인지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됐으니 이제는 이 기묘한 펜팔관계를 좀 더 의미있게 지속할 수 있겠죠? 오늘은 아주 장황한 '양' 소개로 편지를 씁니다. 이제 막 구독한 분들에게도 의미있는 내용이 되겠네요. (박수)
날이 많이 춥습니다. 얼른 어딘가에 맡겨두었던 겨울 옷을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양드림.
ps
저번주 Coldplay를 소개했더니 '나는 내년에 Coldplay 내한공연 보러가는데~ 집에서 낡아빠진 1집이나 들으면서 쉬어라~' 등의 조롱을 하신 분들은 부디 내년 공연 중간에 급똥으로 인한 소소한 사건사고에 휘말리시길 기원합니다. (진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