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안녕하세요. 양입니다.
세상에나 눈이 이렇게 많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1.
이 레터에 종종 우리동네 자랑을 했었는데요. 제가 사는 동네인 어린이대공원은 정말 절경이 되었습니다. 몇년 동안 이 동네에 살면서 풍경에 대한 많은 감사함이 있었지만 이번 초유의 폭설로 정말 좋은 설경을 보며 지냅니다.
거짓말 하나 보태서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새하얀 눈과 거뭇한 나무 가지 밖에 없어요. 잿빛 도시 서울에서 지칠 때면 매번 푸르름을 보여주던 공원이 아주 이국적인 겨울왕국이 되었습니다. 기분이 어느정도로 좋은가 하면 캐나다에 겨울여행 간 기분입니다. (아 여행 가고 싶다...)
눈 덮인 나무 사이로 사진을 찍는 주민들, 그 눈 덮인 나무를 흔들어 뒤집어 쓰고는 웃는 아이들, 별 생각 없이 지나다니던 출퇴근 길에 멈춰서서 그 광경들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나. 오랜만에 동심 가득해지는 따듯한 날입니다.
2.
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이크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요. 주차 문제에서 아주 자유롭기 때문에 바이크 출퇴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 폭설 때도 눈바람을 뚫고 바이크를 몰았습니다. (정신 나갔어)
폭설 덕에 여기저기 차가 막히고 대중교통도 마비 수준이더라고요. 그 복잡한 도시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자유로움이란... 눈보라에 목숨 걸고 바이크를 타는 것에 대한 보상이 만족스럽습니다.
그렇게 바이크를 타고 가는데 웬걸 길가에 나무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눈을 의심)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나무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경찰차가 긴급 출동하고 차들은 모두 비상 깜빡이를 키고 후진! 후진! 빵! 빵! 정신이 없었는데 저는 그 혼란한 틈도 쇽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 자유의 맛.
3.
사실 저는 눈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눈은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불편하게 하니까요. 낙상사고도 많고, 교통사고도 많아집니다. 그리고 옷도 다 젖고 지저분해집니다. 특히 겨울옷은 빨래하기 어려운데 말이죠. 길은 또 얼마나 지저분 합니까. 온갖 쓰레기와 먼지가 뒤엉켜 진흙탕물이 되어버립니다.
갑자기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는 것 말고도 눈이 싫은 이유는 책임감 없이 그냥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도시를 이쁜 쓰레기로 덮어버리고는 낭만에 넘치게 만듭니다. 말그대로 그냥 덮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 아래 복잡함은 그대로지만 일시적인 낭만으로 가려졌을 뿐이죠. (좋다고 실실거릴 땐 언제고..)
눈이 그치고 해가 뜨고 눈은 서서히 녹아 없어집니다. 그럼 그 아래 가려져있던 복잡함이 떠오릅니다. 애초에 눈이 가려주지 않아도 외면했던 그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글로 정리해보니 눈이 녹고 나서야 '아 이런게 가려져 있었구나' 느끼는 것을 싫어하는 거네요. 이를 내 마음과 연결지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회피하고 가려두고 덮어둔 마음 속 모든 것들이 눈에 밟힙니다. 이번 눈이 다 녹고나면 그 복잡함과 마주하고 한 발 나아가는 연말이 되어야겠다 다짐합니다.
일기같은 편지가 되었네요.
님. 눈길 조심하시고, 부쩍 추워진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양드림.
ps
설경에 맞는 따듯하고 아련한 음악을 준비할까 했는데요. 일차원적으로 제목이 'Snow'인 노래를 선곡했습니다. 항상 앨범에 15곡 이상 꽉꽉 눌러 담는 RHCP 형님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을까 싶을 정도로 가사도 꽉꽉 눌러 담습니다.
온 세상이 하얀 지금 낭만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우리 마음 속 눈에 덮인 무언가를 들여다 봐야 할 시간이 되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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