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안녕하세요. 양입니다.
수차례 심리상담과 심리검사 보고서를 쓰고 있지만 언제나 적응이 안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녹취록을 포함한 분석 보고서를 전부 써 내려가면 30페이지가 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분량은 독자의 피곤함을 고려해서 15페이지 내외로 압축하고 줄여서 보고해야하니 꽤 긴 시간을 들여서 요약해야 하거든요. 이게 아주 아주 주옥같이 힘든 작업입니다. 길게 쓰는 것 보다 줄여서 쓰는 것이 더 힘들어요...
'보고서' 라는 말 자체가 말하듯 보고서는 '보고'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도 원페이퍼 보고가 아닌 최소 10회에서 13회 내외로 내담자와 대화한 내용을 15페이지에 압축해서 보고를 해야하기 때문에 녹록치가 않죠. 그 15페이지로 내가 얼마나 사례개념화를 잘 했고, 상담을 유효하게 진행 했고, 이만큼 내담자의 심리를 분석해냈고, 내담자를 치료하기 위한 적절한 목표와 적확한 상담기법을 사용했는지 결과적으로 내담자가 어떤 효능감을 느꼈는지 아주 잘 보고해야합니다.
이제 그 보고서를 중심으로 케이스스터디가 이뤄집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상담을 한 본인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겠지만, 보고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15페이지에 적힌 정보만으로 한 사람을 이해해야합니다. 그 과정에서 보고서를 보는 선생님들 입에서 오해의 말이 오가고 궁금한 점이 많아진다면 그 보고서는 이미 잘못 쓴 보고서가 되겠죠.
그나마 글쟁이 출신이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매번 아주 논리 정연하게 읽기 편한 글을 써서 매끄러운 보고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 15페이지의 글이 아무리 매끄럽고 좋은 글이라고 해도 실존하는 '내담자 자체'를 잘 설명했는지 못했는지는 저만 알 수 있으니까요. 막말로 실수가 있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고, 과거에 있었던 상담에는 없던 적절한 목표들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 나만 알 수 있는 디테일을 만나고 상담을 진행했던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던 순간들, 내담자가 말하는 심리적으로 아주 결정적인 순간들을 만나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정말 많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가 했던 말을 AI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장면을 놓쳐서는 안되겠죠. 내담자야 그럴 수 있어도, 상담사 입장에서는 자격이 의심되는 순간일 겁니다.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지만, 나아가 상담을 잘 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어른이가 되었습니다. '양아 너는 꿈이 뭐냐~' 고 묻는다면 잘 대답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벌써 11월입니다. 간혹 어느 공간에선 캐롤을 듣기도 하는데 2025년도 다 저물어 가네요. 제법 겨울의 냄새도 코에 맴돌고요. 님 별일 없으시죠? 이번주도 정신 건강히 잘 지내셨길 바랍니다.
양 드림.
ps
보고서를 철야로 작성하면서 담배를 입에 대고야 말았습니다. 2026년 1월1일 부터 금연하는 것으로... 일주일만에 일어난 번복사태... 샤인머쓱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