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4 목요일

기홍 님과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오전 11시에 미팅이니까 10시까지는 *을지로 575호에 가고 싶었다. 미팅 전에 끝내고 싶은 업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닫고 엘레베이터에 타자 기홍 님에게 전화가 왔다. 미팅을 오후 1시~2시 사이로 미뤘다. 덕분에 오전 여유가 생겼다. 을지로 575호에 도착하니 택배가 쌓여있었다. 향, 채소 탈수기, 통조림 따개 등 첫 회를 치른 ‘소모임’을 통해 발견한 필수 용품들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택배를 뜯은 건 아니었다. 우선 미팅 전 끝내고 싶던 일에 착수했다. 최근에 깨달은 한 사실 때문이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나서 곧바로 육체 활동을 하면 좋지 않다.’ 이동 중에 이미 육체 활동이 발생했기 때문에 다시 육체 활동을 하면 뇌가 거부한다. 그럼에도 우직하게 또 육체활동을 한다면 결과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이다. 뇌(내)가 하기 싫어하니까. 장소나 공간 이동이 완료되면 정신 활동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게 하루 전체를 봤을 때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이다. 예컨대 9시부터 몰입하고 싶다면 8시 30분에는 그 장소에 도착해 휴식과 준비를 끝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은 건지 똑똑해진 건지 아직 모르겠다만 내게 있어서 앞으로 중요한 지침이 될 듯 싶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은 전체 식물에 물 주는 날이다.(‘스투키’만 매월 7일 1회) 업무 하나를 끝내고 물주기를 시작했다. (화분은 생각보다 정말 무겁다.) 샤워기가 아닌 물뿌리개로 물을 줬다. 물뿌리개도 얼마 전 새로 구입한 필수 용품이었다. 처음부터 ‘필수’는 아니었다. 남자 세 명이 ‘식물 물 주는 요령’이 있는 줄 알리 없었다. 물 줄 때 낙차가 크면 물이 중력을 얻어 화분 흙이 뒤집어진다. 화분에겐 태풍이 온 셈이다. 애써 작은 돌로 정갈하게 정돈 해놓은 흙의 표면이 엉망이 된다. 보기에도 안 좋지만 이후로 물 줄 때마다 흙 불순물이 떠올라 화분 안쪽 벽면에 달라붙어 지저분해진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뿌리개를 산 이유다. 물뿌리개는 물의 중력을 분산시켜 폭포를 부슬비로 만들어준다. 물뿌리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하귤나무와 홍콩야자의 안쪽 화분벽은 오늘도 더러워졌다.

식물 키우는 재미가 있다. 자엽아카시아는 팔불출처럼 여기저기 들고 다니며 이녀석 크는 것 좀 보라고, 연둣잎이 어쩜 이러냐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국평이에게 선물 했다가 심폐소생을 위해 돌아온 글로리아 페페도 굽힌 잎을 펴며 건강을 회복 중이다. 글로리아 페페는 정말이지 위독한 중환자였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흙이 뒤집어지기도 했고 주인도 삶을 살아내느라 매우 바빴다. 요양 며칠 만에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지는 녀석의 모습에 커피가 더욱 맛있다.

+하나하나 차곡히, 생각보다 많이 그립다.

*을지로 575호: 2020년부터 2021년까지 1년 동안 시즌앤워크 팀이 계약해서 운영하던 공유주방. 대림상가 5층 575호에 있었다. 코로나 직방으로 아무것도 못했다. 이건 비밀이다.

개인적으로 소재는 좋은데 아쉬운 다큐멘터리 작품 중 하나이다. 내가 이례적으로 이렇게 강하게 아쉬움을 표방하는 이유는 일본의 현 상황을 영국인 감독이 담는다고 하면 좀 더 객관적이고 진취적으로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무 일본인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물론 이것 또한 감독의 연출일 수도 있다.)

스모는 한국의 씨름처럼 일본의 국기와도 같은 전통 스포츠이다. 일본의 생활체육정책으로 어린 여성 스모 선수들은 일본 내에서 인기도 많고 입지도 탄탄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 스모 협회의 규정과 전통 때문에 유망한 일본 여성 스모 선수들이 진출할 수 있는 프로 무대가 아예 없다. 남성 스모 선수들이 프로로 입문해서 평생 스모 선수를 할 수 있는 것에 반해 강제적으로 20살 전에 취미 활동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프로의 세계는 살벌하다. 하지만 기회조차 박탈 당하는 것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그 불공평한 관습을 곤 히요리는 묵묵히 본인의 발걸음으로 깨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의 여성 인권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라고 이미 여러 매체와 논문들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일본 내에서 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 보다는 그냥 이러한 일본의 전통을 보여주고 소개하는 느낌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너무 아쉬웠다. 그러한 시점이 곤 히요리 라는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물론 내가 너무 주인공에 몰입해서 개인적인 감정이 훅 올라와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는 별로였지만, 끝까지 볼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곤 히요리 선수가 평생 스모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